나의 이야기(mon histoire)

나의 간증: 언제나 우리의 기도를 기억하시는 하나님.......

갑조(甲朝) 2013. 7. 27.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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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내가 동일 교회 새 신자로 등록 하면서 찍은 기념 사진입니다.

                      신**  담임 목사님(左) 와 신앙 도우미를 자원하신 김 **  장립 집사님(右).

언제나 우리의 기도를 기억하시는 하나님……………

 

아주 어릴 적 작은 누님 손에 이끌리어, 크리스마스(성탄절) , 마을 뒷산에 있는 시골 교회에 갔을 때, 그때 배운 단 한 줄의 성경 말씀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누가 복음 2 14절 “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이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라 하느니라” 아멘.

 

사실 저희 가정이 어려울 때, 제일 먼저 아버님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효성 여중 1학년 한 학기를 다니다가, “ 야야, 잠시 시골에 다니러 오라”는 아버님의 연락을 받고, 고향으로 내려 가서, 강제 학업 포기 당하였던 저의 작은 누님(서** 권사)은 그런 환경을 원망하지 않고, 시골에서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온 가족에게 그리스도 복음을 전파하고자 부단히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공민학교, 검정 고시, 김천 간호전문학교를 나오시고, 하나님 은혜로, 1972년부터 독일 하나 우 병원(HanauKrankenHaus) 간호사로 근무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1960년대 당시에 생소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런 누님을 독실한 불교 신자로 매일 천수경을 읊으시는 저의 아버님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집 안마당에서 딸 머리채를 끌고, 성경책을 소 죽 끓이는 가마 불에 던지셨습니다. 핍박하는 아버님에게 전혀 굴하지 않고, 다음날 새벽에 누님은 마을 뒷산에 있는 교회로 새벽기도 드리러 올라가곤 했습니다. 그런 누님의 열정과 권면과 기도와 하나님의 은혜와 보살핌으로, 저의 어머님이1982년경 제일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열심으로 신앙 생활하시다가 1995년 소 천하셨습니다.

 

어머님과 작은 누님의 권면으로 온 가족이 한 사람씩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아버님은 지난해 크게 아프셨을 때, 아버지께서 마지막으로 보고 싶다고 하여 독일 에서 오신 작은 누님과 수지교회 목사님께서 병실로 찾아가 기도하실 때 ‘아멘’ 하시고 예수그리스도 믿는 것을 입술로 시인하셨습니다. 하지만 현재 매주교회에 가서 예배는 드리지 않고 있어서 우리 가족은 늘 중보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 자신도, 신혼 초에 개척교회 한두 번 다니다가 그만둔 후, 신앙생활이 흐지부지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이어지는 해외 생활로 그럭저럭 다람쥐쳇바퀴 도는 단조로운 생활가운데 믿음 없이 평범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여전히 교회는 다니지도 않고, 내 앞에 주어진 일만 묵묵히 하고 살면서 지냈습니다. 1998년 가을 경, 내가 살고 있던 아프리카 기니 아, 코나크리 부두에 “아나스 따지”라는 병원 선교 선이 정박해 있으면서 선교 사진을 찍어 저희 사진 현 상소에서 사진을 인화하기 시작하면서, 다시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접하게 되었고, 우리 현 상소에 들리는 미국인 신자와 가끔씩 만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1999년 봄, 그간의 병원 선교 선이 떠나고 나니, 왠지 뭉클하고 마음이 착잡하여, 내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코나크리 교회에 있던 한인 교회를 찾아가서 약 일년간 다니게 되었습니다. 크게 믿음의 싹이 자라지 않아서인지, 시험에 들어, 저는 2000년도 초 내가 다니던 한인 교회 핵심 집사와 저희 가게와의 충돌로 어쩔 수 없이, 한인 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신앙 생활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너무 답답하고 괴로워, 독일에 계시는 누님에게 더 이상 아프리카 생활이 힘들어 못하겠다는 하소연 편지를 하였더니, 누님께서는“어머님이 생전에 기도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유럽에 와서 살아라, 그러면서 독일 두이스부그에너 자형이 하고 있는 두부 공장을 인수 해서 운영 해 보라고하면서 독일에 한번 오라”는 편지를 받고, 2000 4월 독일에 갔습니다. 두이스부그의 너무 추운 날씨와 고된 두부 공장일, 그리고 내가 운전이 서툰데, 매일 몇 백 킬로를 운전하면서 두부 배달하는 것이 너무 힘든 것 같아 두부 공장 인수는 아예 접었습니다. 그랬더니, 누님께서, 파리에 가면부흥회가 있는데, 한번 참석하고 가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그래서 파리에서 3 4일 부흥회를 마치고 이제 아프리카로 가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출발 날 아침, 제가 머물렀던 목사님 댁에서 사모님이 저에게 이사야 말씀을 읽어주고, 우리 집 아이 문균이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으니, 악한 영의 연결 고리를 끊으려면, 우리가 매일 아침마다 “예수 이름으로 사탄아 물러가라”고 기도해야 된다고, 저에게 신신 당부하였습니다.

 

사모님은 우리 아이가  왜 우리 가족은 이렇게 서로 떨어 져 살아햐 하느냐,  우린  남들처럼  다 함께  살 수 없느냐,  눈물로   기도 하였다는 소릴 들으니 정말 내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코나크리로 가는 비행기안에서 성경책을 꺼내 읽으면서, 이제부터는 제대로 예수를 믿어야 하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매일 식사기도 때 나는 쉬지 않고 예수 이름으로 사탄아 물러 가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제가 예수를 믿고 나서 변한 것 중에 하나는,

 

“언제부터인가 내가 집 사람과 다투든지, 마음에 들지 않는 소리를 들으면, 내가 ‘주여, 주여’ 라고 말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집사람에게 전도하려고 해도 너무 힘이 든다”고 하였더니 독일에 계시는 저희 누님이 올케가 교회에 다니게 하려면 교회가 있는 곳에서 살아야 전도가 되든지 말든지 하지, 말도 안 통하는 아프리카에서 자꾸 교회 다니라고 한다고 하여 그게 가능하겠느냐고 하시면서, 어서 한인 교회가 있는 곳으로 나오라는 조언을 하였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파리의 후견을 통하여 예상치 못하는 소식을 듣고는, 더는 우리 아이와 떨어 져 살아서는 안되겠다 싶어서,아제 부터는 어 떻게 든지 우리 가족이 한집에 같이 살아야 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래서 인지, 나는 오직 두 가지 목표” 즉 –우리 아이 학교 잘 다니고, 집사람이 예수 믿기를 간구하며,”그간의 전 재산을 포기하고 아프리카에서  프랑스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집 사람에게 부탁 하였습니다. 크게 돈 드는 일도 아니고, 우리가 예수만 믿으면, 아이가 잘 된다는데, 왜 못하겠느냐고, 신신당부하여 프랑스에서 약 6여 년 간 퐁뇌프 장로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간 하던 일을 힘들어 하던 집사람은 뜻하지 않게 시험에 들어, 2010년부터 교회를 다니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의 끊임없는 권면에도 끄덕 도 하지 않고, “주여” 소리도 듣기 싫어하며 향수병에 걸린 사람처럼 한국에 가서 살고 싶다고만 하였습니다.

 

말이 통하는 내 나라에서 병원 가서 속 시원히 의사와 소통하고 싶다는 집사람의 소원을 들어 줄 겸, 저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2013 330일 한국으로 영구 귀국하였습니다. 귀국한 다음날 3 31일 부활절 예배 때, 수지 있는 동생 가족을 따라 집사람도 부활절 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저녁때 코오롱에 다니는 내 동생이 들렸을 때, “형님, 대구에서 다닐 교회를 정했느냐고 묻길래, “아니, 가서 집주 변에 있는 교회를 찾아 보겠다고 하니, 내 동생이 말하기를” 형님, 대구는 크지 않으니, 대구 MBC방송국 가까이에 있는 동일 교회가 있습니다. 신 ** 담임 목사님 말씀이 좋고 은혜 충만하다, 동일 교회를 적극 추천하였습니다.

 

 

46일 대구에 내려 와서 다음 말 47(주일) 아직 집 정리도 제대로 안된 상태에서 주일 예배 드리러, 동일 교회를 찾아 가려고 집을 나섰지만, 사람들에게 물어도 잘 모르고 하여 예배 시간을 놓쳐 버리고 그날은 동일 교회 찾아 가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저녁에 동생이 다시 전화해서 “ 형님, 교회에 잘 다녀 왔느냐?”고 하는데, “아니 못 찾았다”. 사실 집 근처 다른 교회가 있어 그곳에 들려 예배만 볼까 생각하다가, “내가 다니고 싶은 동일 교회에 제일 먼저 찾아 가는 것이 낳다 싶어 그만 접고 집으로 그냥 왔다” 하니, 동생이 동일 교회 버스 자원 봉사하는 집사님 전화 번호를 알려 주면서, “오는 주일 아침 850분까지 천주 성삼 병원 앞에서 타면 된다고 안내 해 주었습니다.

 

414일 주일 날 아침 집사님에게 전화하니, 그날 마라톤 행사로 버스 운행은 하지 않는다, 그대신 범어 역 4번 출구로 나오면 봉고 버스가 기다린다고 말하였습니다”. 지하철 출구를 나오니, 연세 드신 몇분이 봉고차 버스 쪽으로 가길래, 혹시 동일 교회로 가느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하길래. 무턱대고 봉고차에 올라 타고 교회로 와서 첫날 10 2부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마친 후 어느 장로님의 안내로 새 신자 신고를 하고, 임** 장로님, 그리고 김 **집사님, 이** 집사님, 문 ** 집사님과 윤 ** 권사님과 같은 좋으신 믿음의 동 역자를 소개 받았습니다.

 

이 분들의 중보 기도의 은혜로, 제발 한번만 교회로 가자고 집사람에게 권면하였더니, 절대 안 갈 것 같은 집사람이 주일날 아침 순순히 같이 따라 나서서 교회로 오고, 그날 새 신자 등록하고, 그리고 한 달간 김** 집사님과 이 ** 집사님의 인도로 4주간 새 신자 확신 반을 무사히 마치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매주 잊지 않고 전화로 권면 해주신 집사님, 장로님 감사합니다.

 

 

한국에 와서 집사람이 교회에 나오고, 예수 믿고, 교회에 다니면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어 너무나 기쁘고 즐겁습니다. 새 신자 환영의 날 예배 석에 앉아 있는 아내 얼굴을 보고 있자니,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인도해 주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기뻤습니다. 나의 오랜 염원이던, 아내의 예수님 영접이 너무나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전 모태 신앙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 순간에도 열렬한 신자도 아닌. 그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기를 소망하는 보통 신자일 뿐입니다.

 

그런 나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성령 충만하고, 말씀이 은혜로운 신 ** 목사님이 봉직하는 동일 교회를 추천하는 그럼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습니다.

 

요즈음 우리 가족은 구순 저희 아버님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능력으로 저희 아버님의 구원을 믿어 마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떠나기 전, 저희 아버님이 온전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영원한 천국에서 어머님과 다시 만날 그날까지 쉬지 않고 기도하겠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잊지 않고 기억해 주신다는 좋으신 하나님을 높이 송축합니다. 할렐루야!

 

(2013.6.27 서 봉)

 

 

 

추신: 아내가 2014년 12월14일(일) 대구 동일 교회에서 세례을 받았습니다. 이제 세례 교인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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